개판 그 자체였던 1978년 무장공비 침투사건
1978년 11월 4일부터 12월 6일까지 약 1달 동안 북한 무장공비 3명이 충남 홍성군 광천읍 해안에 침투하여 군경의 검문과 차단선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빠져나가 김포 한강변에서 대기하던 안내조와 합류하여 월북함
이들은 북상하면서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의 호크 대공미사일 기지를 정찰했음
이들을 잡기 위해 국군 3개 보병사단, 5개 공수부대(특전사) 여단, 항공기 40대, 해군 함정 5척 외에도 경찰, 예비군, 민방위 병력까지 합해 총 20만여 명이 동원되어 충남과 경기 일대에서 봉쇄, 수색 및 매복 작전을 전개함
11월 4일 19:00경 공비들이 광천읍 해안에 상륙 후 말봉산으로 들어갔다 민간인 여성 3명과 조우, 그 중 2명을 살해함
남은 여성 1명이 파출소에 신고하였으나 경찰들은 그냥 단순히 형사 사건으로 취급함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현장에서 북한제 반합과 의복 등이 발견되면서 진돗개 하나가 발령됨
문제는 당시 대간첩작전 본부가 음어를 사용하지 않고 평문으로 통신을 해대는 바람에 북측에서 이 무전을 도청하고 공비들에게 그대로 다 알려줌
11월 15일 18:30경, 공비들은 공주 사곡면 신영리를 지나던 중 초소근무를 하러 가던 민방위 대원 1명과 마주치자 단도로 살해함
이날 20:00경 초소근무 중이던 예비군이 거수자 2명을 목격하였으나 제지하지 않고 보고도 하지 않음
다음날인 16일 10:00경에야 살해당한 민방위 대원의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하여 수사에 들어감
11월 22일 18:00경, 공비들은 회의 끝에 평택역으로 가서 열차표를 사고 열차에 탑승하여 이동함
원래는 천안에서 타려 했으나 시내에 군인들이 너무 많아서 실패했고 중간에 철로에서 대기하다 지나가는 객차에 무임승차도 시도했으나 실패한 상태였음
이들은 병점에서 하차한 뒤 오산 양산리에서 숙영 도중 민간인 1명과 마주치자 또 단도로 살해하고 안양 방면으로 도주함
이 역시 살해당한 민간인의 아버지가 그날 자정 파출소에 신고하면서 뒤늦게 밝혀짐
11월 24일 07:40경, 공수부대 6개 대대와 수도군단이 남양-안양, 반월-시흥에 2중 차단선을 설치함
그런데 보병사단과 공수부대의 편제 차이 때문에 문제가 발생함
보병사단은 1개 중대가 100명 가량이었지만 공수부대는 1개 중대가 약 12명, 즉 1개 분대에 불과했음
그런데 보병부대 지휘관은 이를 모르고선 "여기에 공수부대 1개 중대 깔아놓으면 잡겠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하여 병력을 배치함
이 때문에 공수부대 측은 100명이 감시해야 할 지역을 12명만으로 교대도 없이 하루종일 매복하여 피로가 쌓임
11월 25일 18:05경, 안양 수리산에서 매복 중이던 제3공수특전여단 5중대(12명) 대원들이 공비들이 이동하는 소리를 포착함
대원들은 공비들을 근거리까지 끌어들였으나, 갑자기 중대장이 자신은 잘 안 보인다며 신호탄을 꺼내서 하늘로 쏨
이로 인해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졌고 공수부대원들은 급작스런 눈부심에 적응하지 못하고 공비들을 조준하지 못함
당연히 공비들도 자신들이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바로 도주함
거기다 더해 신호탄이 야산에 떨어져 산불이 발생, 중대장은 대민피해 유발을 걱정하여 공수부대원들에게 공비 추적보다 산불을 진화하라고 명령함
더 웃긴 건 그나마 양심이 남아있었던 중대장이 이 뻘짓을 지역대장에게 사실대로 보고했으나, 정작 지역대장은 이를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묵살함
아무 명령도 내려오지 않자 중대장이 다시 한 번 재차 보고했으나 역시 똑같이 묵살됨
며칠 뒤 산림 감시원이 당시 공비들이 흘리고 간 수첩을 주워서 제보함으로써 진실이 밝혀짐
11월 27일, 공비들은 안양을 통과하여 관악산에서 야영, 단파 무전기로 북측과 교신함
28일 아침이 되자 공비들은 당당하게 관악산을 내려가서 서울대 캠퍼스를 통과한 후 학교 앞 버스정류장 근처 슈퍼에서 빵, 우유, 통조림 등을 구매하여 취식함
11월 28일, 새벽 동안 공비들은 서울 시가지를 도보로 주파하였고 아침에는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 우동을 한 그릇씩 사 먹음
11월 29일 21:50경, 공비들은 부평 6번 국도를 횡단하다가 초병들에게 발각당해 총격을 받음
초병들은 이들을 추적했으나, 하필 같은 시각 근처 뚝방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민간인 3명을 공비로 오인하여 체포하면서 시간을 낭비했고 그 사이 공비들은 도주해버림
조금 뒤 찾아온 상황분석조는 초병들이 헛것을 본 것이라고 치부하며 39;대공용의점 없음39;으로 처리함
12월 3일 20:05경, 김포 감정리에서 공비들이 초소근무 중이던 예비군 2명(송복성(반장,32), 유중근(공무원,27))과 조우함
예비군들이 먼저 수하를 하자 공비들은 당황했고, 이들이 총을 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공비들이 도주함
예비군 대원들은 뒤늦게 총을 삽탄하고 도주방향으로 경고사격을 함
하지만 현장에 찾아온 33사단+중앙정보부+경찰 감식반은 예비군 대원들이 소주를 마셔 취기에 헛것을 본 것이라고 판단하여 현장검증도 하지 않음
12월 4일, 김포 해안경비를 담당하는 해병대 제2여단이 최후의 저지선을 설치하고 제1공수여단 소속 1개 대대와 함께 매복에 들어감
육군이 주도하던 대간첩작전 본부는 해병대에게 해안경계병력까지 싹 다 빼서 내륙 매복으로 돌리라고 요구함
해병대 측은 해안경계도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육군이 그냥 계급으로 찍어누름
게다가 매복에 들어간 공수부대는 이미 지난 한 달 내내 주야간 매복을 반복해온 탓에 전 대원들이 극도로 탈진해 있었고 인원도 부족하여 담당구역을 전부 다 감시하기엔 한계가 있었음
24:00경, 공비들은 상대적으로 매복조 간격이 넓은 공수부대 담당 지역을 통과하여 한강 하구에 접해있는 김포 운양리 감바위에 도착함
이들을 데려갈 안내조는 해병대의 해안경비초소가 텅텅 빈 것을 노려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공비들과 접선하는데 성공함
이들은 공비들에게 잠수 장비를 건네주고 북측으로 데려감
12월 5일 07:00경, 공수부대 측에서 수첩, 오리발 1개 등 유기품을 발견함
다음 해인 1979년 1월 10일, 공비들이 월북했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서 작전히 종료됨
이 작전이 실패함에 따라 한국군의 대간첩작전 역량이 의심을 받았고, 한동안 군의 위상이 크게 추락함
특히 제1공수여단과 제3공수여단은 부대 자체가 해체될 뻔했으나 여단장들이 모 파벌 소속이었기에 별다른 인사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흐지부지됨
ㅊ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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