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도시개조사업, 한성개조사업
한양의 인구수는
19세기부터 급진적으로 늘어나
1세기전에 비해 2배가까이 폭증한 인구가
사대문 밀집하여 바글바글거리기 시작한다.
덕분에 당대 한양은
당대 서양국가들이 인구폭등으로 인해
앞서 경험하던 도시위생, 불법건축물 문제를
똑같이 뼈리게 겪게 되는데..
1850년대 파리개조사업 이전
불법건축 판자촌이 난립한 파리의 모습이다.
조선은 어떠하였을까?
18세기 경기감양도 속 돈의문거리 모습
100년후 같은 장소 돈의문 앞 모습
조선 역시 거리에 온갖 불법건축물들이 들어선 모습이다.
이와 같은 불법건축물, 일명 "가가"가
난립하는 바람에 도로의 폭이
최초에는
대로 15m, 소로 3m라 설정하며 건설되었던 것이
무색하게 개박살이 나버리며,
"한양에는 도로가 없다."는 평가까지 듣는 상황이였다.
이러한 문제점이 끊임없이 재기되자
조선정부역시 1895년부터 대대적인
도시개조사업을 진행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하였냐면..
1. 주요 도로 확충
덕수궁 인근 주요도로들은
이당시에 건설된 것이다.
2. 불법건축물 가가 철거령과
배수로 확보를 통해
하수시스템 정비
참고로 이당시 주요 하수로들은
건설방식이 전통식이든
근대식이든 모두 청계천으로 빠져나가는 형식을 띄고 있었다.
불법건축물들이 철거되는 모습
한성개조사업 이전의 종로의 모습
한성개조사업 이후의 종로의 모습
조선시대 전통식 하수구
1890~1900년대 매설된 근대식 하수구
참고로 20년전 같은 장소를 촬영한 것이다.
3. 주요 랜드마크 건설
도시개조사업간 건설된 파고다공원
당시 조성된 덕수궁 권역
이러한 방식을 통해
사대문 내 주요권역은 확실히 탈바꿈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을 방문하던 서양인들의 평가도
10여년 사이에 크게 바뀐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조선의 도시가 누추하고 더럽다 평가하였던
이사벨라 여사의 평가와 달리
1900년대에 들어서면
위생적인 측면이나 도시경관적인 측면에서
마구잡이로 까는 서술은 확실히 거의 사라지는 측면을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