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모든 것④] 를 둘러싼 상반된 반응

[<조커>의 모든 것④] <조커>를 둘러싼 상반된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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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커>의 모든 것④] <조커>를 둘러싼 상반된 반응 


폭력에 대한 변명 VS 장르 내부의 합의된 게임 


 


강렬하다. 어떤 식으로든 뒤흔든다. 조커는 슈퍼히어로영화 속 수많은 빌런 중에서도 특히 자극적인 영감을 주는 캐릭터다. 토트 필립스 감독과 호아킨 피닉스는 이 위험한 인물의 기원을 매혹적이며 도전적인 방식으로 더듬어 나갔다. 다만 여기서 ‘도전적’이라는 표현에 대해 몇 가지 덧붙일 말이 필요할 것 같다. <조커>의 플롯이나 인물을 그리는 접근방식이 새롭다고 보긴 어렵다. 감독이 공공연하게 밝힌 바와 같이 이 영화는 가깝게는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1976), <분노의 주먹>(1980), <코미디의 왕>(1983)에 빚을 지고 있으며 멀게는 파울 레니 감독의 <웃는 남자>(1928)를 떠올리게 만든다. 요컨대 이건 정신적으로 불안한 한 남자의 영혼을 파헤쳐 내려가는 이야기이자 좁은 무대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사이코드라마다. 한데 그 뒤에 슈퍼히어로 장르 속 캐릭터, 21세기 제작, 현재를 연상시키는 70, 80년대 고담시라는 몇 가지 요소가 더해질 때 흥미로운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조커가 탄생한 이유에 답하고자 하다

<조커>는 설명되지 않은 존재, 설명될 수 없는 캐릭터,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설명하고자 애쓰는 종류의 영화다. <조커>는 조커의 탄생에 대해 합리적이고 말이 되는 이유를 찾으려 한다. 감독의 설명을 빌리자면 “스스로 던진 질문에 우리가 답을 하는 과정에서 스토리를 만들어간” 것이다. 근본적인 질문을 시작하고 싶은 지점은 여기다. 애초에 ‘조커’는 설명이 불가능한 캐릭터였다. <배트맨> 시리즈에서의 조커는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광기의 상태이자 정해진 결과로 등장한다. 조커가 위험한 매혹으로 다가온 것은 기원을 알 수 없는 광기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배트맨에 대한 안티 테제로 던져진 운명의 주사위. 이러한 광기의 발생과정을 정의내리고 고착시키려 할 때 그 섬뜩하고 불편한 동시에 매혹적인 혼란은 그 색과 형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단적으로 말해 <조커>는 ‘카오스의 형상화’라는 점에서 인정할 만한 성취를 거둔다. 동시에 바로 그곳이 영화를 둘러싼 엇갈린 반응의 시작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이래 <조커>를 둘러싼 상반된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다. 대체로 호평이지만 이 영화의 위험성 혹은 상투적 지점을 지적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대표적으로 <타임>은 <조커>가 정신병적인 행동에 대한 미화를 불러일으킨다고 비판했다. 집단 총격 사건을 일으키는 등 폭력을 시도하는 인물에 대해 동정심을 유발하도록 변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해당 글에선 무엇보다 조커가 집착하는 분노의 기원을 가짜 철학으로 포장하고 있다는 점을 위험하게 바라본다. 특히 세상으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해 유발된 분노를 빈부격차에 대한 사회적 분노로 연결시킨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물론 조커는 ‘세상을 웃게 하고 싶었을 뿐’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다고 하겠지만 적어도 그 방아쇠로 활용되도록 내버려둔다는 점에서 책임을 방기하는, 또는 미학의 영역으로 미뤄두는 영화의 태도가 불쾌함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이 견해는 결을 조금 더 나눠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조커>를 아서(호아킨 피닉스)라는 코미디언이 조커라는 페르소나로 거듭나는 이야기라고 했을 때, 이건 조커로 각성하는 과정을 그린 것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정확히는 인기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한 남자가 폭동을 일으킨 대중(사회의 불만세력)으로부터 조커라는 위치로 지정받았을 때 그걸 수용하는 쪽에 가깝다. 전자의 조커가 대중을 선동하는 혁명가라면 후자는 대중에게 호명된 상징물에 불과하다. <타임>을 비롯한 몇몇 매체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건 이 영화가 조커의 기원과 정당성, 두 가지를 수시로 혼동하고 교차시킨다는 데 있다. 이에 대해 토트 필립스 감독은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답한다. “2012년 오로라 총기 난사 사건과 영화 <조커>는 전혀 상관이 없으며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이라는 것이다. 토트 필립스는 <AP>와 가진 인터뷰에서 <존 윅3: 파라벨룸>을 언급하며 “한 백인 남자가 300명이 넘는 사람을 죽일 때 관객은 그걸 즐기고 응원까지 한다. 왜 <조커>는 다른 기준으로 평가되어지는지 모르겠다. 이해가 안 된다”라고 했다.

슈퍼히어로 내지는 장르영화로 볼 때 토트 필립스의 항변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이건 어디까지나 가상의 세계, 만들어진 시공간을 배경으로 조커라는 캐릭터를 설명해내려는 ‘영화’이고 다소 폭력적인 부분이 있다 하더라도 장르라는 안전장치 내부에서 벌어지는 합의된 게임이라고 거리를 둘 수 있다. 문제는 <조커>가 다양한 방식으로 장르적인 거리를 지우고 사실주의 영화의 대열에 합류하고자 시도한다는 점이다. 설사 그게 의도가 아니었을지라도 그렇게 착각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놓는다. 부자를 향한 대중의 분노는 70년대 고담시라는 가상의 공간이 아니라 지금 현재 마주하는 현실의 거울로 작동한다. 거기에 자기애적 망상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사회의 무관심에 좌절하고 파괴적인 충동을 분출하는 과정을 겹쳐놓을 때 두 가지는 의도와 무관하게 강력한 연결고리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조커>는 단지 영화일 뿐인가, 아니면 영화 이상의 파급력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가. <조커>에 대한 호불호는 이 지점에서 갈린다고 본다. 극찬을 하는 쪽과 문제를 제기하는 쪽, 양쪽 모두 동의하는 건 이 영화가 강렬한 방식으로 마음을 뒤흔든다는 것이다. 때문에 각자의 체험에 대해 의견을 나눌 때 오해를 살 여지가 발생한다. 가령 <인디와이어>의 데이비드 에얼리히는 <조커>에 대해 아쉬움을 표하며 “자아도취에 대한 영화, 억제되지 않은 혼란의 대리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평했다. 그런 맥락에서 영화를 비하하는 의미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대중오락영화”라고 말했는데, 워너브러더스가 이걸 버젓이 홍보문구로 사용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조커>를 대중 오락영화로 볼 것인가, 사회비판과 풍자를 바탕에 깔고 있는 사실적인 영화로 볼 것인가. 혹은 슈퍼히어로 장르로 볼 것인가, 아니면 사회고발적인 드라마로 접근할 것인가. 영화는 관객에게 의도된 혼란을 던지고 있다.

평생 존재감 없이 살아온 아서가 우발적으로 저지른 살인에 대해 “저 사람은 영웅이야”라는 반응을 들었을 때(그것이 비록 망상이었을지언정) 그는 행위와 반응에 대한 착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세상 사람들이 드디어 자신을 봐준다는 착각. 조커는 대중을 선동하지 말라는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의 지적에 “내가 그런 사람 같아 보여?”라고 반문한다. 조커의 말은 진심이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오해가 파도처럼 번져나갈 때 기꺼이 거기에 몸을 던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아서가 조커라는 대중의 욕구를 받아들이는(또는 이용하는) 과정은 캐릭터 장르영화인 <조커>가 사실적인 드라마의 미학적 완성도를 이용하는 방식과 닮았다. 영화는 분명 70, 80년대 고담시라는 가상의 시공간을 무대로 하지만 여타 <배트맨> 시리즈와 달리 고담시라는 공간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 있을 법한 드라마, 진짜 같은 이야기, 사실적인 심리묘사에 공을 들일 따름이다.

호아킨 피닉스의 위력

그리고 이 모든 오해와 왜곡의 중심에는 호아킨 피닉스가 서 있다.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하는 아서의 내면이 서술되는 과정은 실로 설득력이 있다. 만약 언어로 옮긴다면 나르시시스트의 자기변명처럼 보일 수 있는 일련의 변명들이 호아킨 피닉스의 육체에 깃들어 어떤 동작으로 변모할 때 우리는 그 자기파괴적인 에너지에 매료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인간의 어두운 부분을 담은 아름다운 율동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뒤틀린 어깨 근육으로도 연기를 하는 호아킨 피닉스는 인물의 내면을 구체적으로 서술하는 대신 광기라는 상태를 제 한몸에 조각해나가기 시작한다. 그 순간 분리되어야 마땅할 것들이 그 형용하기 힘든 에너지 속으로 함몰되며 뒤섞인다. 호아킨 피닉스로 인해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 장르의 경계와 안전장치를 부수고 나와 현실 속에 침투하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폭동을 바란 건 아니지만 폭동이라는 형태로 돌아온 반응에 동조하기 시작한 아서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이 영화 끝에 조커라는 캐릭터가 아니라 조커를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만이 돋보인다는 사실이다. 영화 후반부 조커 분장을 하고 <머레이 쇼>에 출연하기 위해 계단을 내려오면서 춤을 추는 장면을 통해 조커는 비로소 완성된다. 이때 조커를 조커로 만드는 건 그동안 쌓아온 서사가 아니다. 오직 호아킨 피닉스의 춤, 아니 몸짓이다. 슬로가 걸린 이 춤사위의 전반부와 후반부에는 두 가지 다른 음악이 깔려 있는데 롱테이크로 한번에 잡아내고 있다. 음악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어떤 음악이 깔려도 상관없었을 것 같다. 오직 호아킨 피닉스가 추는 춤이, 발작하듯 뒤틀리고 어딘가 어색해서 더 멋들어진 그 율동이 곧 조커를 설명한다. 그 시퀀스 전체가 관객의 뇌리에 박혀 강렬하게 뒤흔들긴 하지만 그건 조커의 매력이 아니라 호아킨 피닉스의 위력이다.





출처 :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9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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