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영도 움찔하게 만든 악역의 탄생…칼 갈고 나온 문정희

이경영도 움찔하게 만든 악역의 탄생…칼 갈고 나온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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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영도 움찔하게 만든 악역의 탄생…칼 갈고 나온 문정희 


[민경원의 심스틸러]
드라마 ‘배가본드’의 로비스트 제시카 리
백윤식 등 악역 전문 배우 사이서 돋보여
정형성 벗어난 연기, 강약 완급 조절 강점
“기능적, 소모적 여성 캐릭터 벗어나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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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에서 무기 로비스트 그룹 존앤마크사의 아시아 담당 사장 역을 맡은 문정희. [사진 SBS]

SBS 금토드라마 ‘배가본드’는 독특한 드라마다. 제작비 250억원이 투입된 대작이지만 화려한 액션에 방점이 찍혀 있는 첩보물인지, 아니면 민항 여객기 추락 사고의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수사물인지 그 경계가 다소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버전 1.0과 2.0으로 나누어 공개한 인물관계도만 봐도 국정원ㆍ유가족ㆍ청와대는 물론 추락 사고의 배후로 의심받고 있는 무기 로비스트 그룹 다이나믹 KP와 존앤마크사까지 5~6개 그룹으로 나뉘어 복잡한 양상을 띤다. 덕분에 카메라가 이들 중 누구를 비추고 있느냐에 따라 첩보ㆍ스릴러ㆍ멜로 등 장르도 휙휙 바뀐다.

이는 ‘자이언트’(2010) 같은 시대물이나 ‘기황후’(2013~2014) 같은 사극을 주로 해온 장영철ㆍ정경순 작가의 성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들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시대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막강한 힘을 휘두른다. 그게 재력이 됐든, 무력이 됐든 간에 권력을 쥐고 있는, 혹은 쥐고자 하는 이들의 암투가 남다른 흡입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가본드’에서 스턴트맨 출신 유가족 차달건(이승기)과 국정원 막내 요원 고해리(배수지)에게는 아무런 힘이 없다. 두 사람이 아무리 뛰어난 개인기를 발휘한다 해도 권력을 가진 자의 후방 지원이 없으면 자력갱생이 힘들단 얘기다.

 

‘배가본드’에서 경쟁업체 수장 역을 맡은 이경영과는 과거 사제지간이자 연인이었다. [사진 SBS]
 

그래서 시선이 자꾸만 분산된다. 앞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들이 아닌 뒤에서 두뇌싸움을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목이 쏠린다.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는 국정원 민재식 국장(정만식)부터 청와대 민정수석 윤한기(김민종)로 연결되는 어둠의 커넥션은 과연 어디까지 향해 있는가. 국무총리 홍순조(문성근), 대통령 정국표(백윤식) 등 진짜 악의 축은 누구인가에 관심이 더 쏠리는 것이다. 주인공 커플의 로맨스보다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자 자리를 놓고 다투는 다이나믹의 수장 에드워드 박(이경영)과 존앤마크사 아시아 담당 사장인 제시카 리(문정희)의 관계가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백윤식ㆍ이경영ㆍ정만식 등은 한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영화 ‘내부자들’(2015)을 차치하더라도 이미 악역 연기의 최고봉에 오른 배우들이다. 문성근 역시 ‘1987’(2017)을 비롯악역에 일가견이 있다. 이들 중 누가 선함의 기운을 풍기기만 해도 열혈 시청자들은 “그럴 리가 없다”며 그가 바로 악의 축임을 입증하는 증거를 찾아 나설 정도다. 반면 문정희(43)가 그동안 맡아온 역할은 주로 ‘카트’(2014)나 ‘판도라’(2016)처럼 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쪽이었다. 한데 180도 돌변해서는 내로라하는 악역 전문 배우들 사이에서도 남다른 표독스러움을 뿜어내니 눈에 띌 수밖에. 비단 그가 홍일점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영화 ‘카트’의 한 장면. 문정희는 싱글맘 혜미 역을 맡아 열연했다. [사진 리틀빅픽처스]
 
영화 ‘판도라’의 한 장면. 역할 비중은 크지 않지만 짙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NEW]
 

문정희의 연기가 돋보이는 것은 그가 악역이 지닌 정형성을 교묘하게 비껴가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악역에 있어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를 표출하는 모습은 한 회에 한 번씩은 등장하는 필수 요소다. 하지만 그는 분노에 차서 소리치거나 눈물을 터트리지 않는다. 이번 판이 실패하면 웃으며 다음 판을 짤 뿐이다. 국방부 장관이 넘어오지 않으면 그 아래 있는 경쟁자들의 약점을 미끼로 한 자리에 모아 성 접대를 한다거나 마침내 차세대 전투기 사업을 따서 축배를 드는 날 자신의 애장품 경매를 통해 뇌물을 건네는 식이다. 직접 공격에 나서 자기 손을 더럽히기보다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이 될 수 있게 복잡한 덫을 만드는 셈이다.

이처럼 강단 있으면서도 유연한 완급 조절은 새로운 여성 캐릭터에 대한 문정희의 오랜 염원과 철저한 준비 덕분이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여성 캐릭터의 부재’에 대한 아쉬움을 여러 차례 표현해왔다. “대다수의 여성 캐릭터가 극 안에서 소모적이거나 기능적으로 사용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호소해온 그에게 스토리 전개의 키를 쥐고 있는 역할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기회였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칼을 갈고 나온 그의 대사는 하나도 허투루 넘어가는 법이 없다. “동양 여성으로서 이 자리까지 오는 게 쉬웠겠냐”는 평범한 대사마저 귓가를 맴돌게 한다. 유창한 영어 대사는 넷플릭스 해외 시청자를 염두에 두고 밤낮없이 연습한 결과다.
  

SNL코리아’에서 살사 댄스 실력을 뽐낸 문정희. [사진 tvN]
 

그가 배우로서 걸어온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1기로 입학해 98년 극단 학전의 연극 ‘의형제’로 데뷔하면서부터 그의 연기는 정평이 나 있었지만 좋은 작품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오디션을 빌미로 밤마다 제작자들이 술자리로 불러내는 게 싫어 2년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을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한예종 동기인 이선균과 오만석의 제안으로 함께 뮤지컬 ‘록키호러쇼’ 무대에 서고, 취미로 시작한 살사 댄스로 생계를 유지하며 무명 시절을 견뎠다. ‘바람의 전설’(2004)로 인연을 맺은 박정우 감독의 페르소나로 거듭나 ‘쏜다’(2007) ‘연가시’(2012) ‘판도라’(2016) 등 전 작품을 함께 하며 두 사람 모두 차근차근 계단식으로 성장해왔다.

그가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소화할 수 있는 배우에서 그칠까. 아니다. 문정희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촛불 집회 참석을 숨기지 않을 만큼 시대의 변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고, 책을 읽다가 출판사에 전화해 판권을 문의할 만큼 부지런하면서도 실행력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언젠가 그가 발굴한 여성 캐릭터, 혹은 그가 만든 여성 서사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을 발판 삼아 그간 다뤄지지 않았던 더 많은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길 기대한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출처 :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25&aid=0002947831&date=20191026&type=1&rankingSectionId=103&rankingSeq=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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