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간 조선 사신단의 필수 코스
청나라에 간 조선 사신단의 필수 코스
베이징 남동쪽에는 금나라 시절 세워진 탑인 법장사(法藏寺)가 있었다, 이 7층짜리 탑은 일대를 둘러볼 수 있는 랜드마크로, 당시 청나라를 방문하던 조선 사신단들에게 관광 명소였다. 이는 당시 사신으로 갔던 여러 인물들의 일기에도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들이 가서 무엇을 했는지 직접 보자.
- 김창업(金昌業)의 연행일기(燕行日記), 계사년(1713년, 숙종 3년)
드디어 법장사(法藏寺)를 방문하러 천단, 북단(北壇) 밖으로 해서 동쪽을 향하여 가니 절 가운데 탑이 이미 보인다. 냇물 하나를 건넜는데, 물은 얕고 모래가 많다. 높이는 10장, 8면에 7층 탑이다. 탑 아래 남쪽으로 무지개 문이 나 있는데, 겨우 사람이 들어갈 만하다. 창에 의지하여 사방을 둘러보니, 서쪽으로는 천장(天墻), 북쪽으로는 황성이 모두 역력히 보인다. 탑 안에는 제명(題名: 이름을 새김)이 많아서 나도 상층에 ‘조선인 김모, 모년 모월 모일 와서 오르다.’라 적었다.
- 홍대용(洪大容) (湛軒書), 을유년(1766년, 영조 42년)
법장사는 외성 영정문(永定門) 안 천단 동쪽 수 리 지점에 있었다. 절 뒤로 고탑(古塔)이 있는데 높이가 수십 길이고 8면 7층이었다. 속으로 나선형(螺旋形) 사다리가 있는데 매층마다 수십 계단이 된다. 아래층에 문이 있고 문을 들어서면 굴 집 같아 삐걱 소리를 내고 사다리를 오르면 밤 같은 기분이 들어 마음 약한 사람은 무서워 더 오르지를 못한다. 매양 한 층을 오르면 8면으로 다 창문이 나 있는데 가운데에 감실을 만들어 불상을 모셨다. 한 쪽에 김 공(金公)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서 나도 그 옆에 제명 하였다.
- 박지원(朴趾源) 열하일기 (熱河日記), 계해년(1780년, 정조5년)
천단(天壇) 북녘 담장을 따라 동으로 몇 리 가면 법장사(法藏寺)가 있다. 가운데는 텅 비어 나선형으로 층층대를 놓았는데, 한밤중같이 캄캄하므로 손으로 더듬어 발을 떼어 놓는데, 마치 귀신 동굴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벌써 한 층을 올라오고 보니, 여덟 개 창문이 활짝 터져 눈과 정신이 시원해졌다. 7층까지 차례로 올라가는데, 한 번씩 꿈을 꾸었다 깨는 듯했다. 층대마다 팔 면이요, 한 면마다 창문이 났고, 창마다 부처가 있어 무려 쉰여덟 개나 된다. 그 제일층에는 우리나라 김공(金公) 창업(昌業)의 제명이 있고, 그 밑에는 또 을유년(1766년)에 다녀간 내 친구 홍군(洪君) 대용(大容)의 제명이 있는데, 먹빛이 금방 쓴 것 같았다. 그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노라니, 마치 그들과 함께 이야기라도 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 서장보(徐長輔) 계산기정(薊山紀程), 갑자년(1804년, 순조 4년)
탑이 절문 밖에 있는데, 일곱 층 여덟 모에 100길 정도 되었고, 부도(浮圖)는 매층마다에 서까래 하나씩을, 더 올렸으며, 매면 열두 서까래의 가운데에는 배심(坯心)을 만들었다. 그리고 또 일곱 층 여덟 모에는 빙빙 돌아서 오르게 된 나사 모양의 사다리를 놓았고, 남쪽에는 드나드는 문을 설치했으며, 문안에는 여래(如來)의 상(像)을 모셨는데, 그 길이는 두 발 남짓 되었다. 전문으로 들어가서 도성 안팎을 바라보니, 팔방의 경치는 보는 데 따라 일정하지 않았다. 위층에는 둥근 비석이 있는데, 경태(景泰) 연간에 세운 것이다. 벽 위에는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많이 씌어 있다. 나도 역시 그 위에 이름을 썼다.
- 김경선(金景善) 연원직지(燕轅直指), 계사년(1833년, 순조 33년)
절 뒤에 백탑(백탑)이 있다. 높이가 수십 길[장]이고 8면 7층에 벽돌로 쌓았다. . 그 가운데로 들어가니 곧 층층 사다리가 있다. 나선(나선)의 제도로 만들어 불안하기가 깜깜한 밤중과 같아서, 담이 약한 자는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 좌우편 벽에 써진 이름은 전부 우리나라 사람의 것이었는데, 친구들 중에 연경에 사신 온 자의 것이 많았다. 그리고 심지어는 옛것을 지우고 새로 써서 붓을 댈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맨 위의 불감(불감) 동쪽 벽에다 ‘조선 김모(김모)’라고 큼직하게 쓰고, 곁에 성신의 성명을 쓰고, 그 아래에 ‘계사(계사) 정월 3일’이라고 가로로 썼다. 부사 및 여러 사람들도 다 이름을 적었다.
- 서경순(徐慶淳) 몽경당일사(夢經堂日史), 을묘년(1855년, 철종 6년)
탑은 6층에 여덟 모로서 높이는 10여 장(丈)쯤 되고 속이 비어서 올라갈 수 있었다. 8면으로 창문을 내고 창문에는 부처 1좌(座)씩을 두었으며, 밖에는 전문(箭門)을 설치했으니, 아마 소통시켜서 밝은 빛이 들도록 한 것인 듯하다. 복도를 따라 돌다가 마침 창문이 있기에 그 창문으로 내다보았더니, 황성(皇城)의 전경을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탑 꼭대기에는 우리나라 사신들이 제명(題名)해 놓은 것이 많아서 우리도 똑같이 했다.
한줄요약 -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문화재에 낙서하고 옴
참고로 저 법장사는
1965년에 '노후화'를 이유로 해체됨